1989년 4월 24일 편지글

경미 누나 보시오
새벽 2시. 뜨거운 액체. 코피란 놈이 날 잠에서 깨워 버렸읍니다.
정말로 따분하고 신경질 나는 주말이었읍니다.
자다가 깨다가 책 좀 읽다가 또 자다가, 정말로 제대로 된 주말이 아니었읍니다.
아침 굶고 점심엔 라면 저녁엔 제대로 먹는다고 마른 반찬 1000원, 오이 3개 500원, 감자 1000원에 사서 해 먹었는데 점점 게을러지기 시작합니다.
자취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게으름이란 곧 영양실조를 의미하는데, 스스로 알아서 챙겨 먹어야 하는데, 쌀도 떨어지고 연탄도 2장 남았는데, 비 오고 추운 날 땔려고 남겨 두었는데, 돈도 1710원 남았는데,
주머니 비니까 그냥 불안해지니까.
누나 그냥 불안하다. 바람만 조금 세게 불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
어딘가에서부터 쌓아올라간 벽돌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 어쩌면 쌓아 올리지조차 않았을 벽들이, 기반부터 빠져버림을....
누나 참으로 우수운 얘기고 참을 수 없는 이야기인것 같아요.
누군가의 삶의 가치와 가치관을 위해서 주위의 누군가의 삶이 파괴되고 힘들어야 한다는 사실.
정말로 참기 힘든 일입니다.
2달에서 10일 조금 빠지는 생활 속에서 써클에 정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내가 떠난 후에 써클 문학반 이야기 모음 집에 선배 하나가 써 놓은 글이 그래도 정이 들었음을....
우리가 매일 매일의 일을 정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과의 관계도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교 계속 나가기로 했읍니다.
학교 일로 성남 누이 집에 들렀는데 그날 술 취하신 아버지가 내 생활이 궁금해서 전화를 했답니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내 결심이 와르르 무너져 내립니다.
자식 새끼 500원짜리 밥 먹는다는 사실에, 자식 새끼 500원짜리 밥을 위해서 5시 30분까지 노동판에서 일하신다는 아버지.
자식 새끼의 보답없는 삶을 위해서 그날도 야근하신다는 어머니.
누나 내가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버리고 말았읍니다.
아무런 소득도 없는 갈등과 방황이라는 방황을 했읍니다.
아무런 얻은 것도 없읍니다. 얻은 것이 있다면 내 삶의 방향을 매형과 누이들에게 설복까지는 안가는 선이지만 표명은 하고 뜻은 비추었으니까.

어디 어떤 길로 가든 간에 내 삶의 길은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내 방 앞 마당에 강아지 한 마리가 있는데, 목련나무와 그 놈의 목을 철고리로 이어진 끈이 이어 놓고 있읍니다.
가끔씩 놈은 그 끈을 끊고 나갈려고 무진장 노력합니다.
하지만, 끈을 이기지는 못하고 제 집으로 돌아와 버립니다.
내 삶이 그런것 같아요. 무엇인가 굵고 단단한 줄이 내 삶이라는 놈의 목을 감고 있다는 사실.
그래 난 그 줄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만 뱅뱅 돌고만 있다는 사실.
가끔씩 그 생활의 범위의 한계를 벗어나려고 애는 쓰지만 그 줄이 너무도 강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버리는 그게 내 삶인 것 같읍니다.
그 끈 내 삶의 목을 쥐고 있는 끈. 그 끈이 무엇일까요.
가정, 부모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5월부터 아르바이트 자리 구해볼 작정입니다. 경제적인 면에서부터 끈을 끊어야 할 것 같아요.
내 주위의 환경, 경제적인 부분, 가정이 내 삶의 가능성과 내가 생각 할 수 있는 사상의 범위와 활동의 범위를 축소시키고 한계를 지운다는 사실.
참으로 우스운 일입니다.
대담해지기로 했읍니다.

4월이구나 했더니, 이제는 4월이 가고 있읍니다.
시험 끝나고 내 일이 정리되고 자리 잡는대로 속초 내려 가겠읍니다.
몰론 집에는 들르지 않고 몰래 그때 보기로 하고 이만.
물어보지 않아도 잘 정리하고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겠지요 (?)

1989년 4월 24일 새벽 3시 경에
김용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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